인공지능이 없애버릴 해커톤의 낭만
역설적이게도, 이제 해커톤이 의미 있으려면 해커톤이 아니어야 한다.
오늘도 11,000+명의 창업가와 투자자가 주실밸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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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실리콘밸리를 있게한 해커톤의 낭만
대 바이브 코딩시대의 한가운데인 지금 해커톤이 넘쳐납니다. 당연히 저도 여기저기서 구경할 일이 많았는데, 갈수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승작을 클로드코드에 넣으면 금방 복제되는 시대에, 해커톤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해커톤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해커톤에는 분명 지금의 실리콘밸리를 있게 한 그 특유의 정신과 낭만이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뭐든 질문하는 성격이라, 요즘 범람하는 해커톤들을 보면서 — 그리고 모두가 해커톤에 참석할 수 있고 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 인센티브와 시장의 관점에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이 해커톤 아이디어들을 누가 보고 있느냐입니다. 과연 누굴까요? distribution을 비롯한 다른 해자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과거 형식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데는 아이디어가 중요하고, 개발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AI가 다 만들어주니까요.
해커톤은 이제 distribution 없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공개하고, 그걸 지켜보던 distribution 있는 사람들이 수확하는 자리, 아니면 인공지능 인프라 회사들이 본인들 프로덕트 홍보하는 자리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 해커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전제
전통적인 해커톤은 세 가지 전제 위에 서 있었습니다.
첫째, 만드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코딩할 수 있는 사람이 희소했고, 48시간 만에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의 증명이었습니다. “우리 팀에 풀스택 개발자 있어” — 이 한 마디가 해커톤에서의 경쟁력이었습니다. 개발 능력이 희소자원이었기 때문에, 개발을 기념하는 포맷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둘째, 해커톤 자체가 distribution이었습니다. 공급망이 없는 빌더에게 해커톤 무대는 아주 좋은 채널이었습니다. 거기 서면 투자자 눈에 띄고, 미디어에 나오고, 공동창업자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공개해도 안전했고 그럴 가치가 있었습니다.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해커톤이 distribution까지 제공했으니까요. “좋은 아이디어네, 근데 만들 수 있어?”가 자연스러운 장벽이었고, 공개하면 피드백을 받고, 투자자 눈에 띄고, 팀원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리스크 대비 리워드가 명확했습니다.
이 세 전제가 동시에 무너졌습니다.

Claude Code를 비롯한 다양한 툴들로 이제 의사도, 변호사도, 대학생도 금방 소프트웨어를 개발합니다. 최근 Anthropic 해커톤에서 13,000명이 지원하고 500명이 선발됐는데, 최종 우승자 5명 중 전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단 1명이었습니다. 1위는 상해 전문 변호사, 3위는 브뤼셀의 심장내과 전문의, 나머지는 전자음악가와 도로 인프라 작업자였습니다. 만드는 능력이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심지어 저도 혼자서 이미 여러 개의 앱을 만들어서 쓰고 있습니다(아래는 시작에 불과했고, 아예 제 맥북 앱을 만든게 점점 많아지는데 느낀 점은 따로 글로 써보겠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해커톤을 주최한 Anthropic의 의도입니다. 7일 만에 만든 비개발자의 앱이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았을까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Anthropic이 필요했던 건 “Claude만 있으면 코딩을 모르는 도메인 전문가도 7일 만에 앱을 만든다”는 내러티브입니다. 해커톤을 주최하는 최고의 인공지능 회사조차 개발 능력이 아니라 자사 AI의 GTM 쇼케이스로 해커톤을 쓰고 있습니다. 해커톤의 시대가 끝났다는 증거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드는 능력이 희소하지 않으면, 아이디어 공개의 리스크-리워드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예전에는 아이디어를 보여줘도 만들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데모 영상 하나면 다음 날 복제본이 나옵니다. 해커톤은 본질적으로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포맷입니다. 공개하는 순간 그걸 보던 모두가 따라할 수 있는 시대에, 왜 무대 위에서 자기 아이디어를 보여줄까요?
개인적으로 이제 정말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은 해커톤에 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만들고, 조용히 론칭하고, 경쟁자가 알아챌 때쯤 이미 유저를 확보하고 해자를 만들기 시작할 겁니다. 따라서 해커톤에 나오는 아이디어는 역선택(adverse selection)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결국 공개해도 괜찮을 만큼 차별화가 없는 아이디어들만 해커톤에 나오는 거죠.
2. “같이 모여서 빌드한다”는 전우애의 종말
“그래도 해커톤은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만드는 경험이 가치 있잖아.”
솔직히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가치에 비해 리스크가 큰 상황이 되어버린거죠.
덧붙여 같이 모여서 만드는 게 가치 있으려면, 각자가 희소한 무언가를 가져와야 합니다. 예전에는 “나는 프론트엔드, 너는 백엔드, 너는 디자인”이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는 거였고, 그 분업을 48시간 안에 조율하는 능력이 팀의 경쟁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 사람이 Claude에게 전체 그림을 쥐여주고 전부 시키면 됩니다. 프론트엔드, 백엔드, 디자이너가 회의실에 모여 API 스펙을 맞추고 디자인을 넘겨받는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0’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의하고 조율할 시간에 1명이 여러 AI에이전트와 풀스택을 밀어버리는 게 훨씬 빠릅니다. 실제로 최근 해커톤에서 1~2인 팀이 커뮤니케이션 병목에 빠진 5인 팀을 압도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빌드 말고 네트워킹이 핵심이다”라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밋업이지 해커톤이 아닙니다. 함께 힘들게 밤새고 고생하면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전우애와 유대감이 해커톤 네트워킹의 본질이었는데, 만드는 과정 자체가 너무 쉬워져버리면 그 유대감도 얕아집니다.
3. 매출 해커톤이라는 새로운 허상
최근 해커톤들의 트렌드를 보면 개발의 의미가 줄어드니 축을 옮겼습니다. “만드는 건 다 되니까, 파는 걸 겨루자.” 매출 해커톤, 세일즈 해커톤 — 요즘 가장 핫한 포맷이고 신선하고 재미있는 접근입니다. 다만 저는 이 부분도 완벽한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 안에 매출을 만드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공격적 할인, 지인 네트워크 동원, 무료 체험 후 자동 결제. 전부 acquisition 전술이지, retention 전략이 아닙니다. 그렇게 급하게 찍은 매출이 6개월 뒤에도 남아있을까요? 심사위원이 측정하는 건 “얼마나 빨리 돈을 받았는가”이지, “그 고객이 6개월 뒤에도 남아있는가”가 아닙니다.
이건 마치 치킨집 오픈 첫날 매출로 사업의 성패를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픈 첫날은 지인이 옵니다. 일주일 뒤에 지인이 안 오면 빈자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해커톤이 보는 건 치킨집 오픈 첫날뿐입니다.
4. 해커톤의 역설
그렇다면 해커톤을 진짜 의미 있게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이제는 24시간이 아니라 최소 6개월은 봐야 프로덕트의 진짜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acquisition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retention입니다. 첫날 매출이 아니라, 반년 뒤에도 고객이 남아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경쟁자의 복제 시도를 견뎌야 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프로덕트를 보고 1시간 만에 따라 만들었는데도 고객이 안 떠나야 합니다. 아이디어를 비공개로 해야 합니다. 공개하는 순간 경쟁우위가 사라지니까요.
근데 잠깐. 이걸 다 적용하면 이게 무엇일까요?
시간 제한을 6개월로 늘리면 = 액셀러레이터
리텐션까지 측정하면 = 시장
아이디어를 비공개로 하면 = 스텔스모드 / 평가 기준 논란
다시말해 해커톤을 개선하면 할수록, 해커톤이 아닌 무언가가 됩니다.
결국 해커톤의 포맷 자체에 내재된 제약 — 짧은 시간, 공개 발표, 즉석 팀 구성 — 이 역설적이게도 해커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어버린 겁니다. 인공지능은 해커톤이 제약을 풀면 해커톤이 아니고, 제약을 유지하면 의미가 없어지게 만들어버린겁니다.
5. 그래서 어쩌라고
인공지능 시대 이전에는 높은 산을 정복하기 위해 팀을 구성하고 꼼꼼하게 계획을 짜서 정상을 향해 등산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나타나서 산 정상까지 4차선 도로를 뚫어버렸습니다.
이제 모두가 차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조금 더 효율적이고 누가 조금 더 빠르게 가느냐의 속도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모두가 힘들이지 않고 빠르게 산에 올라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거죠.
그리고 지금 더 중요해진 건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어느 산에 올라갈 것인가(Problem Selection)
모두가 자동차를 타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승패는 “남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를 찾아내는 데서 갈립니다. 코딩 스킬이 아니라, 특정 산업의 최전선에서 구르고 깨지며 얻은 통찰력만이 진짜 돈이 되는 산의 좌표를 알려줍니다. 상해 전문 변호사가 Anthropic 해커톤에서 1위를 한 건 코딩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현장에서만 보이는 문제, 정확한 산을 골랐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산 정상에 어떻게 해자(Moat)를 팔 것인가.
차를 타고 가장 먼저 올라갔다고 끝이 아닙니다. 다음 날이면 수백 명의 경쟁자가 똑같은 도로를 달려 올라옵니다. 누군가 내 프로덕트를 1시간 만에 복제했을 때, 그들이 나를 밀어내지 못하게 만들 방어막이 필요합니다.
이제 해자는 코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AI가 긁어갈 수 없는 오프라인의 끈적한 신뢰의 파트너십, 한 번 쌓이면 떠날 수 없는 데이터 락인(Lock-in), 혹은 브랜드를 향한 맹목적인 팬덤, 나만의 고유한 distribution 채널로 만들어집니다. 코드는 하루면 복제됩니다. 하지만 신뢰는 1년이 걸립니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압도적으로 발전한 시대에, 비즈니스를 지키는 해자는 가장 비기술적인 영역에서 구축되어야 합니다.
셋째, 어떻게 산이 아니라 우주(New Paradigm)로 나아갈 것인가.
어느 산을 고를지, 정상을 어떻게 지킬지 — 이건 여전히 산이라는 프레임 안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진짜 패러다임 전환은 산 자체를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초기 모바일 앱은 웹사이트를 폰에 욱여넣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혁신은 GPS, 카메라, 터치 — 모바일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나왔을 때 시작됐습니다.
지금 대부분은 과거의 소프트웨어를 AI로 더 빨리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도로를 타고 산을 빨리 올라가는 것. 하지만 도로는 결국 산 위에서 끝납니다.
SpaceX는 새로운 시장을 위해 다른 산이 아니라 우주로 갔습니다. AI가 없으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건, 더 빨리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우주로 나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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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능력이 더 이상 희소하지 않은 시대. 해커톤의 낭만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 누구의 신뢰를 얻을 것인가, 왜 나만 할 수 있는가 — 기술을 빼고 남는 이 질문들이 비즈니스의 진짜 서바이벌입니다.
그리고 그 서바이벌은 이제 막, 가장 본질적인 형태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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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시각으로 보니 해커톤이 점점 흑백요리사 같은 포맷으로도 진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엔 누가 더 잘 만들었는가의 낭만이 있었다면, 이제는 개발 배경이 없는 사람도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캐릭터를 들고 등장해 의외의 결과를 만드는 서사가 더 크게 먹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코더 출신과 비코더 출신이 같은 무대에서 겨루는 해커톤이, 기능보다도 더 강한 콘텐츠적 낭만을 만들 수도 있겠네요 ㅋㅋ